'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옥성호 지음/ 부흥과 개혁사)'를 읽고

Posted at 2009/12/26 23:18 // in 밑줄긋기/Jesus // by 이지연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것처럼 멍하다.


이 시대는 얼마나 거짓진리에 현혹당하기 쉬운가?
아니, 이 시대 뿐 아니라 모든 시대가 그러한 것 같다.

교묘한 말씀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그 시대의 사탄과 교묘하게 기독교인척 하는 지금의 사탄은 다르지 않다.


코칭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심리학에 대한 이해와 목표관리라는 측면에서 성공에 관한 것(자기계발을 포함한)을 자주 접하게 된다.

물론 여전히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깊지 못해 아직은 어디까지가 경계해야할 부분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 뿌리가 성경적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의 무의식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할 수 있으며, 성공학에서 말하는 소위 '끌어당김의 법칙'(혹은 시크릿 법칙)을 통해 보여지는 자연주의적인 종교관점은 하나님의 존재를 자연의 일부로 추락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됐다.


자신 속에 있는 잠재능력을 확인하게 하는 코칭 역시도 잘못하면 인간 안에 있는 신성을 찾아내어 '완전함'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으로 흐른다면 그 개념이나 방법에 있어서 자칫 뉴에이지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마 한 대 맞은 것 처럼 멍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공부 전에 하나님을 아는 것이, 그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아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비단 내가 꼭 코칭쪽이나 심리학을 배우거나 직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더 사명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일반 다른 직업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 귀한 책으로 깨워준 찡샨에게 감사를.


-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옥성호 지음/ 부흥과 개혁사)'를 읽고
2009/12/26 23:18 2009/12/26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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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 제임스 패커 지음 (2)

Posted at 2009/12/18 14:21 // in 밑줄긋기/Jesus // by 이지연

성육신하신 하나님 - 성탄절의 메시지

저자의 말대로 복음의 메시지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것이다.
대속의 의미나 부활의 문제는 믿기 어려운 사실일 수 있다. (예수님의 시체가 도둑맞은 것이라는 걸 아직까지도 증명하려는 것 같다. 언젠가 그런 다큐를 본 적이 있는듯)
게다가 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기적은 아마 더더욱 믿기 어려운 내용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성육신의 신비를 알게 된다면 아마도 이런 의문은 한방에 풀릴 것이다.


(p. 71~88 내용 정리)

성탄절이 의미하는 진정한 희소식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이다.
불멸의 하나님이 신성을 유지하신채로 사람이 됐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다음일들은 완전히 앞 뒤가 일치하는 일들이다.

우리의 하나님이 조그맣게 줄어든 것, 이해를 뛰어넘는 그 분이 인간이 되는 것 -찰스 웨슬리

성탄절의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곧 성부의 뜻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십년 후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 가난하게 되셨고 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으므로, 타락한 인류에게 용서의 소망,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소망, 영광의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성탄절 정신'은 성탄절에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그분의 정신이 인간들의 삶에서 재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탄절의 정신은 1년 내내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되어야만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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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 기쁨이 되는 동시에 경건해져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2009/12/18 14:21 2009/12/1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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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 제임스 패커 지음 (1)

Posted at 2009/12/18 13:08 // in 밑줄긋기/Jesus // by 이지연
하나님 아는 약간의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많은 양의 지식보다 값지다. (p.31)

이것은 말장난인가? 아니다.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차이를 감으로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복음주의자로서 그렇게 말해야만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통해 우리가 갖게 된 불쾌한 일이나 우리가 갖지 못한 유쾌한 일들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가이다. (p. 33)

...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변치 않는 결과는 하나님의 대의를 위해 기도하는 정력이며- 그런 내적 긴장은 실로 기도를 통해서만 표출되고 경감될 수 있다-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러한 열망은 더욱 커진다. 우리는 이것으로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다. (p.35)
...

우리의 만족이 얼마나 광범위한가 하는 것 역시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척도이다. (p. 39)


하나님을 아는 활동은 무엇을 포함할까?

(p. 48의 내용 정리)

1.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께서 그것을 해석해 주시는 대로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
2.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을 주목하는 것
3.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하는 것
4, 하나님이 이처럼 당신에게 가까이 오사 당신을 신적 교제로 이끌어들인 것에서 나타내 보이신 사랑을 인식하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


결국, (p. 51~55 내용 정리)

첫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이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관련되는 일이다.  -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적이고 의지적인 관계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감정적인 관계이다.

셋째,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이다. -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 지금부터 영원토록 주어지는 구원의 의미.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아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발견되는 그 무엇도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그처럼 자주 환멸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에 대해 환멸을 느끼도록 할 수 없으며 또한 내게 복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결심을 억누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큰 위안을 얻게 된다.

2009/12/18 13:08 2009/12/18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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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 오스 기니스 (2) - 재능과 욕망 사이

Posted at 2009/10/07 13:22 // in 밑줄긋기/Jesus // by 이지연

모차르트에 대한 살리에르의 질투에 대한 이야기는 모차르트를 아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아는 이야기일듯.
내 안에도 무시못할 크기로 자라나는 '질투'에 대한 문제를 참으로 명료하게 다룬 챕터다.

(이하 본문 내용 중 일부)

모차르트.
200년이 지난 지금 모차르트란 이름이 천재와 동의어로, 또 지극한 음악적 환희와 유사어로 여겨지는 시점에서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어떻게 그처럼 창조적인 재능을 지닌 인물이 그렇게도 인정받지 못할 수 있었을까? 사랑과 호의를 거절당한 상실감이 그의 죽음을 재촉했고 그 죽음과 더불어 미처 태어나지 못한 수많은 작품이 사장된 것은 아닐까? 모차르트의 실제 인생과 각색된 인생에는 모두 통렬하고 비극적인 차원이 있는데, 이는 소명의 또 다른 측면을 밝히 보여 준다. 소명의 진리는 재능과 욕망과 거의 불가피한 질투의 유혹 사이의 연계성을 깊이 다루어 준다.

...

질투의 독특성은 그 죄를 짓는 자가 그것을 결코 즐기지 못하며, 고백하는 경우가 거의 드문 유일한 죄라는 데 있다.

...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경쟁이 예증하듯이 소명이 질투에 약한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질투는 우리의 재능과 깊은 욕구가 우리의 소명 의식과 얽혀진 곳에 침투한다. 우리 자신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재능뿐 아니라 우리가 성취하기를 갈구하는 깊은 욕구를 알아야 한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욕구가 그저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것이 아닌 이유는 우리에게는 의식적으로 갖는 선한 욕구와 함께 의식하지 못하는 저급한 욕구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질투는 경쟁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소명을 타락시킨다...자존심은 경쟁적이고 질투는 자존심이 경쟁에서 상처입은 결과다.


셋째, 질투는 소명을 공격한다. 그 이유는 소명은 직접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데 비해 질투는 본질적으로 불경스럽기 때문이다.

...

나를 보잘것없는 존재로 만드는 다른 누군가의 성공이 그 사람의 소명에 기인한 것이라면, 나의 불만은 그저 상대방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에게 반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한 사람씩 부르신다. 비교는 부질없는 짓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억측은 시간 낭비이며, 질투는 어리석은 죄악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부름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만 책임이 있으며, 그분만을 기쁘시게 해야 하며, 결국에는 그분으로부터만 인정받게 되어 있다. 우리가 혹시라도 유혹을 받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서로를 비교하면서 남의 빈보를 우리 자신의 소명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한다면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 역시 듣게 될 것이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나를 따르라!"

p. 204~211

2009/10/07 13:22 2009/10/0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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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 - 오스 기니스 (1) - 우리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

Posted at 2009/10/03 13:20 // in 밑줄긋기/Jesus // by 이지연

'코칭' 관련 책을 먼저 들었다가 얼마전 후배에게 빌려놓은 책에 먼저 눈이 가서 천천히 정독하는 중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는...

이런 고민은 사춘기때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그때는 꽤나 진지하게 고민했던 문제들을 막상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때에는 오히려 생각을 안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혹은 그런 고민들이 너무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해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이 시대의 치열함 때문일까?  
아니면, 골치 아프기 싫어서 그런 치열함 속에 일부러 숨는 것일까?
혹은 대면하기엔 자신이 없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이건간에 인생의 기로에서 결국은 대면해야할 이 근본적인 문제에 매우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는 책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한결같이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뭔가 변화를 도모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좋은 유산을 남기기 원한다. 랄프 에머슨의 말처럼 우리는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놓고 떠나고”싶어한다. 우리네 가슴속에는 우리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 곧 존재 목적을 성취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깊은 갈망이 충족되지 않는 한 다른 모든 성공의 척도-부, 권력, 지위, 친구 관계 등-는 하찮고도 허무한 것이 되고 만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 공허감이 헨리 소로우가 묘사한 ‘조용한 자포자기의 인생’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 공허감과 무목적성이 더 큰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도스도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초고에서는 인간이 그 존재 목적에 대해 회의할 때 영혼에 어떤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는지를 종교 재판소장이 묘사하는 내용이 나온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의 비밀은 그저 생존하는 것뿐 아니라…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확고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삶을 수용할 수 없고 지구상에 살아 남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최고의 선, 궁극적인 목적, 인생의 의미 등 무엇이라 불러도 좋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문제는 우리 인생의 모든 계절에 걸쳐 무수한 모습으로 떠오르게 마련이다.

p. 7-9

2009/10/03 13:20 2009/10/0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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